2025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왜 최종 단계에서 연기되었나?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지형을 바꿀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2025년 상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으로 꼽히며 수많은 투자자의 지지를 받았던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 의무화 조항이 당초 예상과 달리 이번 국회 본회의 처리 안건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무산’이 아닌, 보다 정교한 설계를 위한 ‘단계적 추진’으로의 전략적 전환에 가깝습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가장 강력한 카드 중 하나로 여겨졌던 이 제도는 왜 속도 조절에 들어갔을까요?

본 개정안의 연기 배경을 심층 분석하고,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 이슈를 둘러싼 향후 입법 로드맵과 시장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 자본시장의 미래를 전망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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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의 본질: ‘자기주식’은 누구를 위한 제도인가?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 논의의 중심에는 ‘자사주(자기주식)’의 이중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제도의 명암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첫걸음입니다.

주주가치 제고의 도구

  • 기업이 자사의 주식을 시장에서 매입하면 유통 주식 수가 감소하여 주당순이익(EPS)이 상승합니다. 이는 곧 주가 부양으로 이어질 수 있어
  • 가장 대표적인 주주환원 정책으로 평가받습니다.

지배주주의 방어 수단

  • 문제는 매입한 자사주를 소각(완전히 없애는 것)하지 않고 기업이 계속 보유할 때 발생합니다.
  • 현행법상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경영진이 우호적인 제3자(백기사)에게 매각하는 순간, 대주주의 경영권을 방어하는 강력한 ‘마법의 무기’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 이러한 특성은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에는 유리하지만, 일반 주주의 이익과는 상충될 수 있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여당(민주당)은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면 일정 기간 내에 의무적으로 소각하도록 법제화를 추진했습니다.

자사주 매입의 목적이 진정한 의미의 주주환원으로 귀결되도록 강제하려는 취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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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조절의 배경: 왜 ‘연기’를 택했나?

주주 친화적인 정책으로 보였던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최종 단계에서 연기된 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1. 경영권 방어 수단 부재에 대한 우려

가장 큰 배경으로는 재계에서 제기한 ‘경영권 방어’ 문제가 꼽힙니다. 자사주 소각이 의무화될 경우, 해외 투기 자본의 적대적 M&A(인수합병)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재계에서는 포이즌 필(Poison Pill)이나 차등의결권 같은 선진적인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없는 한국의 제도적 현실에서, 자사주는 사실상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어 카드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만약 이 카드가 사라진다면, 기업들은 단기 이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장기적인 연구개발 투자 위축과 성장 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 주요 논거로 제시되었습니다.

규제 도입에 앞서 보완적인 방어 수단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국민의 힘의 주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2. 글로벌 스탠다드 및 경영 유연성 논쟁

‘글로벌 스탠다드’와의 불일치 또한 주요 반대 논리였습니다. 미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자사주의 취득 및 처분이 비교적 자유롭습니다.

기업이 경영 전략에 따라 자사주를 M&A 대금으로 지급하거나 임직원 스톡옵션으로 활용하는 등 유연한 자본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유독 한국에서만 자사주 소각을 강제하는 것은 글로벌 추세에 역행하는 과도한 규제이며, 국내 기업의 경쟁력을 저해하는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결국 정책 당국은 이러한 재계의 우려와 경영권 방어 수단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할 때, 보다 폭넓은 사회적 합의와 정교한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강행’ 대신 ‘단계적 추진’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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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추진 계획과 시장의 반응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는 멈춘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타임라인 위에서 다시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의 후속 계획

  • 더불어민주당은 7월 임시국회에서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관련 공청회를 먼저 개최하여 지배구조 개선의 다른 축을 논의하고,
  • 핵심 쟁점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는 정기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 이는 이 문제가 단기적인 이슈가 아닌, 중장기적인 입법 과제로 관리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기업들의 선제적 대응

  • 입법이 연기되었음에도 시장은 이미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부 기업들은 규제 현실화에 대비해 선제적인 조치에 나서고 있습니다.
    • 태광산업은 교환사채(EB) 발행을 통해 보유 자사주 처분을 시도하며, 자사주를 활용한 자금 조달과 잠재적 규제 리스크 관리를 동시에 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 일부 기업은 주주들의 거센 압박과 지배구조 개선 요구를 피하기 위해 자진 상장폐지를 선택하는 등 시장의 역동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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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가치 제고 vs 기업 경영 안정

이번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 논의는 ‘주주가치 제고’와 ‘경영 안정’이라는 두 가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깊은 고민을 보여줍니다.

구분주주 및 투자자 입장기업 (경영진) 입장
핵심 가치주주가치 제고 및 투명성경영의 안정성 및 유연성
자사주 소각의무화를 통해 주주환원 실질화기업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야 함
주요 논리진정한 주주환원의 완성
대주주의 사익 편취 및 지배력 남용 방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핵심
적대적 M&A에 대한 현실적 방어 수단
M&A, 임직원 보상 등 자본 정책의 유연성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는 과도한 규제
기대 효과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증대, 코스피 재평가안정적 경영 환경 속 장기 성장 동력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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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주 소각 의무화, 새로운 국면의 시작

2025년 상법 개정안에서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연기된 것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여정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더 큰 합의를 위한 숨 고르기이자 새로운 국면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는 문제의 해결이 아닌 ‘유예’이며, 논의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투자자에게

  • 이제는 단순히 기업의 자사주 매입 공시를 넘어, 소각 계획의 유무와 구체적인 실행을 더욱 꼼꼼히 살펴야 합니다. 또한, 7월 임시국회와 정기국회에서 진행될 입법 과정을 주시하며,
  • 자사주를 과도하게 보유하며 지배력 강화에만 치중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주주총회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기업에게

  • 당장의 규제는 피했지만, 이는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신호입니다. 이번 유예 기간을 자발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실질적인 주주환원 정책을 실행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 시장의 기대를 뛰어넘는 선제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결국 더 강한 규제와 시장의 외면이라는 이중고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상법개정 자사주 소각을 둘러싼 논의는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바로미터입니다. 이 논쟁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우리 자본 시장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이제 공은 다시 국회와 기업, 그리고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넘어왔습니다.